2014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과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 (음성 꽃동네 방문기)

2014년 방한 프란치스코 교황

솔직히 저는 교회에 다닌 지 9개월이 됐을 무렵까지도 

한국 천주교가 이렇게 피로 시작된 역사라는 걸 잘 몰랐습니다. 

1784년 명례방에서 시작된 신앙이 1년 만에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그 이후 수많은 순교자가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직접 뵙고 나서야 그 무게가 비로소 가슴에 닿았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초대 한국 천주교의 시작

한국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해는 1784년입니다. 

이벽, 정약용, 정약전 같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모여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에서 기도를 드리던 것이 그 출발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인 1785년, 이 모임이 형조(刑曹), 

즉 당시 사법 행정을 담당하던 관청에 발각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입니다. 

쉽게 말하면, 을사년에 추조(형조의 다른 이름)에 의해 신자들이 적발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잡혀 온 신자들을 문초(問招)하려 했습니다. 

문초란 죄인을 심문하는 행위로, 요즘으로 치면 조사나 심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면면을 보니 이벽, 정약용, 정약전, 권상학 같은 당대 최고 명문가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손댈 수가 없었죠. 

결국 양반들은 타이른 뒤 돌려보내고, 

집주인이자 역관(譯官)이었던 김범우 선생에게만 분풀이처럼 매질을 가한 뒤 귀양을 보냈습니다. 

역관이란 외국어를 통역하는 직책으로, 지식인이었지만 신분은 중인(中人) 계층이었습니다.

김범우 선생은 귀양지로 가는 내내 천주교 교리를 전했고, 귀양처에 도착한 후 매 맞은 상처가 덧나 돌아가셨습니다. 

이 때문에 달레 신부는 그를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의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된 첫 순교자는 1791년 진산 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이지만, 

두 인물이 '최초'라는 수식어를 함께 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박해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 최초의 천주교 박해
  • 1791년 진산 사건 — 윤지충, 조선 최초 공식 사형 순교
  • 1801년 신유박해 — 최초의 전국적 박해
  • 1815년 경상도 박해 — 지방 박해
  • 1839년 기해박해 — 두 번째 전국적 박해, 최초의 순교 성인 배출


이 흐름을 보면, 한국 천주교는 외부에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선비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받아들인 자발적 신앙이었다는 점이 정말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도 이 점을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신앙 유형, 당신은 어디에 속합니까

박해가 시작되자 신자들의 반응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솔직히 뜨끔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유형의 신앙인인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당시 신자들을 들여다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선각적 지식인형(先覺的 知識人型)입니다. 

선각적 지식인형이란, 시대를 앞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선구자적 지식인을 뜻합니다. 

5천 년 유교 전통 사회에서 남녀평등, 일부일처제 같은 

가톨릭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암 이벽, 다산 정약용, 정약전 같은 인물이 여기 속합니다. 

그러나 박해가 닥치자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정약용도 "나는 천주교를 그만 믿겠다"고 선언했고, 이내 평택 현감 벼슬에 나갔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 셈입니다.

두 번째는 현세적 기복형(現世的 祈福型)입니다. 

현세적 기복형이란, 현실에서 복을 받겠다는 목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무당, 관운장, 일월성신 등 여러 신을 섬기다가 

"천주님 한 분만 잘 모시면 된다"는 말에 이끌려 입교한 사람들이죠. 

이들은 박해가 시작되자 교회를 떠났을 뿐 아니라, 

동료 신자들을 밀고(密告)하고 떠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대목이 제게는 가장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순교자 수만큼 밀고자가 있었다는 사실. 우리는 순교자의 이야기를 주로 기억하지만, 

그 옆에는 항상 배신의 역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연쇄적 내세지향형(來世志向型)입니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관리, 가렴주구(苛斂誅求), 

즉 관리들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백성을 착취하는 행태에 지친 민중들이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말에 위안을 얻어 입교한 유형입니다. 

염세주의적 신앙이라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 매달린다는 점에서 진정성은 있지만 

이 세상 안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복음의 핵심을 놓친 형태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참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입니다. 

앞의 세 유형이 모두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 

신학적 용어로는 레므난트(Remnant), 즉 '남은 자'라 부릅니다. 

레므난트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소수의 핵심 신자를 뜻합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꽃동네에서 교황님을 뵌 날, 그 길이 떠오릅니다

2014년 8월 15일, 저는 월차를 내고 아침 일찍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님과 신자들과 함께 충북 음성 꽃동네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사목 방문(司牧訪問) 하시는 일정 중 하나였죠. 

사목 방문이란 교황이 특정 지역의 교회 공동체를 직접 찾아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식 방문을 뜻합니다.

꽃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차가 밀려 거북이걸음이 됐습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는데, 

교황님을 볼 수 있는 장소까지 약 3킬로미터, 그것도 가파른 고갯길 세 개가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사람이 워낙 많아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오히려 덜 힘들었습니다. 

그 3킬로미터 내내 끝없이 이어진 신자들의 행렬. 그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요. 교황님이 오셨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경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국가 원수급 의전이라면 당연히 고급 의전차가 따라붙는 게 일반적인데, 

가장 소박한 차를 선택하신 모습에서 몸으로 겸손을 느꼈습니다. 

교황님은 끝없이 도열한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시고 다음 일정으로 향하셨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 가슴에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날 저는 교회에 다닌 지 겨우 9개월째였고, 세례를 위한 교리교육(敎理敎育)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교리교육이란 세례성사를 받기 전 천주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배우는 정식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신자들보다 더 들뜨고 감격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그 자리에서 순교자들의 신앙과 교황님의 겸손이 하나로 겹쳐 보였던 것 같습니다.

교황청 공식 사이트에도 당시 방한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그 방문은 한국 교회에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1792년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를 떠올립니다. 

충청도 홍천 음정리에 살던 양반이었던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 밥을 구하러 오는 사람에게 잔소리 대신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주었습니다. 

"사랑이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죠. 

그는 군수 앞에서 문초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마두(마테오 리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 허리뼈가 부러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고,

1792년 12월 27일 추운 겨울 밤 찬물을 끼얹혀 순교했습니다. 

그 겸손과 교황님의 경차가, 이상하게도 같은 결로 느껴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2014년 방한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용하신 경차는 어떤 차종이었나요?


A. 당시 교황청 의전팀이 준비한 국산 경차 '솔라티'나 고급 대형차가 아닌, 가장 작은 체급의 '기아 쏘울'이었습니다. 소박함과 겸손을 강조한 교황님의 행보로 당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꽃동네로 향하던 그 고갯길이 선명합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흘린 땀 한 방울이, 

이 땅의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조금이라도 이어져 있기를 바랐던 마음. 

아직도 제게 선교는 잘 안 되고, 말 한마디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원시장 베드로가 사랑으로 밥 한 끼를 내주면서 동네 사람들을 이끌었듯, 

거창한 말보다 작은 실천이 먼저임을 다시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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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www.tundra7.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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