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받고 난 후 기적들 (원죄, 회개, 성령충만, 냉담)

세례 받고 난 후 기적들

사람의 피부세포는 4주마다 완전히 교체됩니다. 평생 약 천 번, 우리는 이미 육신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이 멈추는 느낌이었습니다. 몸은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워지는데, 마음은 왜 그토록 바꾸기가 어려운 걸까. 거듭남(重生)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지를 저 자신의 신앙 여정과 함께 풀어봤습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고, 참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령과 거듭남을 나타내는 신학 삽화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 기껏해야 100년인데 왜 아웅다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거기에 만족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며 지냅니다.

그렇게 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보이지 않는 소외감, 

불행하다는 자괴감 등이 없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안쓰러워서 매일 기도중에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하느님 저 사람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시어 그들에게도 주님의 평화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성과는 아주 미미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원죄와 누룩 — 마음 안에 이미 심겨진 것


원죄(原罪, Original Sin)란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된 죄의 성향을 뜻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바깥에서 들어온 바이러스가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 본성 안에 자리 잡은 죄로 기울어진 성향입니다. 쉽게 말해, 태어날 때부터 죄 쪽으로 기울어진 채 세상에 나온다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곤 합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라도 반죽 안에 들어가면 숙성되며 퍼지듯, 원죄는 방치할수록 행동 죄(actual sin)로 번집니다. 행동 죄란 원죄가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물입니다. 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리기 전에 무언가 개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암세포의 비유도 인상적입니다. 암(癌)은 외부에서 침입한 세균이 아니라, 죽어야 할 시점에 죽지 않고 계속 증식하는 내 몸의 세포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마음 안에 머무는 나쁜 성품은 점점 자기 집을 짓고, 결국 내면을 잠식합니다. 저는 세례를 받기 전 꽤 오랫동안 이 상태였다고 솔직히 인정합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녔지만,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뒤엉켜 있었습니다.


회개 — 뱀이 허물을 벗는 일


회개(悔改, Metanoia)란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는 그리스어로 '마음의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죄를 향해 기울어진 방향을 성령 쪽으로 틀어놓는 전환점입니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회개 없이는 영적 성장이 멈춥니다.

2013년 12월 21일, 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베드로입니다. 세례 직후에는 정말로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참 힘든 시기였는데도 세상이 다 제 것 같았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 감각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일을 다니면서도 근처에 성당이 보이면 들어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증평성당 새벽 6시 미사 전, 무릎을 꿇고 늘 하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일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처럼 들려온 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다 가졌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 그날 이후 저는 세속적인 청원기도를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그게 제 회개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거창한 고해성사 장면이 아니라, 새벽 성당 마루 위에서 홀로 얼어붙는 경험이었습니다.

거듭남(重生)이란 한자로 '다시 날 생(生)' 자를 씁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지만, 이 탄생은 육(肉)이 아닌 영(靈)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 그릇을 키우는 일


성령충만(聖靈充滿, Fullness of the Holy Spirit)이란 성령께서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거듭난 사람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말 '얼굴'의 어원을 보면, '얼'(정신·영혼)이 바깥으로 나와 있는 '굴'(구멍), 즉 눈·코·입이 합쳐진 말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비추는 창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소금 이야기가 여기서 꽤 정확한 비유가 됩니다. 물 한 대접에 소금을 넣으면 지독하게 짜지만, 같은 소금을 샘물에 넣으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소금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입니다. 내 마음의 그릇이 작으면 작은 상처도 치명적이고, 그릇이 크면 같은 고통도 희석됩니다.

디모테오 전서 4장 5절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거룩함(Holiness, 聖化)이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 유지의 문제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도 신앙 생활의 지속성과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종교적 권유가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 경험상, 말씀과 기도를 꾸준히 이어가지 않으면 그 충만함은 생각보다 빠르게 식습니다.

성령충만이 이루어진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타인이 형제·자매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 그냥 지나치던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 옵니다.

감사 기도의 소재가 청원보다 많아집니다. — 저는 지금 감사 기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가 됐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 손톱을 깎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집니다. — 손가락을 자르는 게 아니라 손톱만 잘라내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영적 상태에 관심이 생깁니다. —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흐릿해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이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처음 읽을 때는 그냥 경건한 문장으로 넘겼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냉담 — 마귀가 여덟 마리로 돌아오는 이유


냉담(冷淡, Lukewarmness)이란 신앙이 식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한 번 거룩해졌다고 해서 그 상태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이게 사실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영이 나갔다가 다시 일곱 영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 번 비워진 집이 더 많은 것들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는 임종 직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제 멋대로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셨다면, 저는 거만하고 인정 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파기하셨고, 원치 않는 길로 저를 이끌어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 고백이 묵직한 이유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내 의지가 줄어드는 것을 감사하게 된다는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냉담이 시작되는 징후는 생각보다 미세합니다. 대한성서공회 자료에도 나와 있듯, 로마서 7장 21-23절은 이 상태를 정확히 묘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자꾸 옛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힘 사이의 긴장, 이것이 냉담의 출발점입니다.

'개꼬리 삼 년 두어도 황모(황모/족제비 꼬리털) 못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 주변에도 수십 년을 성당에 다니면서도 늘 불평이 많고, 정작 공동체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는 분들을 봤습니다. 솔직히 저도 한때 그런 모습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미사 후 점심 먹고 돌아오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적도 있었으니까요.

냉담을 막는 건 결국 두 가지입니다. 말씀과 기도. 화분을 어두운 곳에서 햇볕 드는 쪽으로 옮기는 것처럼, 영적 수행(靈的修行)이란 그 화분을 매일 조금씩 빛 쪽으로 밀어놓는 작업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거듭남과 세례는 같은 건가요?

A. 세례(洗禮, Baptism)는 거듭남의 시작점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면 원죄가 씻기고 성령을 받지만, 이후의 성화(聖化) 과정은 평생 지속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죄악이 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Q. 냉담해진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올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그 길은 다시 말씀과 기도로 돌아오는 것 외에 지름길이 없습니다. 냉담이 무서운 이유는 본인이 냉담한지 잘 모른다는 점인데, '감사할 일이 얼마나 떠오르는가'를 기준으로 스스로 점검해 보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Q. 회개를 여러 번 반복해도 되는 건가요?

A. 신앙에서 회개는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피부가 4주마다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듯, 마음도 지속적으로 씻겨야 합니다. 다만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회개만 반복하는 것은 진짜 회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방향의 전환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게 핵심입니다.

Q. 성령충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나요?

A.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것이 너무 뻔하게 들릴 수 있는데, 실제로 해보면 이 두 가지를 꾸준히 하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저는 감사 기도를 습관화한 이후로 마음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청원보다 감사가 많아질수록 성령충만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Q.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왜 변화가 없는 걸까요?

A. 기간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개꼬리는 아무리 오래 두어도 족제비 꼬리털이 되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래 다닌 것과 거듭난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실제로 받아들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일치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기간과 관계없이 제자리입니다.


사람이 살면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저는 요즘 이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 안에서 아웅다웅할 시간에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세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피부가 4주마다 새로워지듯, 말씀과 기도 안에서 매일 조금씩 허물을 벗는 과정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오늘도 감사 기도를 드리며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글이 비슷한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작은 실마리가 되길 바랍니다.


---

참고: www.tundra7.com

인기글

조선 천주교 전파 (서세동점, 자생신앙, 토착화)

홍유한과 분배 정의 (교환 정의, 애덕 실천, 신앙 체험)

부에노스아이레스 성체 기적 (과학적 분석, 실제 현존, 무신론자 회심)

성녀 파우스티나의 환시 (연옥, 지옥, 천국)

추석 미사와 순교 영성: 제사 대신 미사를 택한 날, 그리고 밀고자의 역사

메르스 공포 속에서 경험한 성령 체험과 신앙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