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미사와 순교 영성: 제사 대신 미사를 택한 날, 그리고 밀고자의 역사


추석날 성당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고향에서 차례를 준비하거나 가족 모임으로 바쁜 날인데, 저는 올해 한가위를 미사로 시작했습니다. 순교성월(殉敎聖月)을 맞아 조상님의 은덕을 미사 안에서 감사드리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 되었고, 그 선택이 옳다는 것을 미사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추석과 미사, 제사 대신 선택한 것들

명절이 되면 주부들은 30여 가지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예전에는 그 노동 강도 때문에 고부 갈등이 명절마다 터지곤 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명절 음식 준비가 주는 피로감은 적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제사 대신 미사를 봉헌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사 자리에 앉아보면, 그 선택이 참 현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향한 곳은 고향 가까이 자리한 산남동성당이었습니다. 몇 번밖에 가지 못한 곳인데도 아담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을 금방 편하게 해줍니다. 미사 시작 전, 성당 안에 분향대(焚香臺)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분향대란 향을 피워 고인이나 조상을 기리는 예를 갖추는 상징적 장치인데, 천주교에서는 이를 통해 조상 공경의 마음을 전례(典禮) 안에서 표현합니다. 전례(典禮)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예배 의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저는 미사 예물도 계좌 이체로 봉헌했습니다. 남들이 하거나 말거나, 그 작은 봉헌이 조상님께 드리는 저만의 감사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신부님의 강론도 인상 깊었습니다. 2년 전 지인이 심은 밤나무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작년엔 밤송이가 23개, 올해는 나무에 직접 올라가 털어야 할 만큼 많이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밤 한 톨이 생겨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태풍과 번개와 천둥을 맞았겠느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습니다. 제가 늘 성령 체험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이 있어야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이 시련과 성장의 의미는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박해의 역사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순교성월에 다시 읽는 밀고자의 역사

순교성월을 맞아 한국 순교자들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면, 단순한 감동 이상의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혹시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는 1784년 정기 집회로 시작되었는데,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785년에 첫 번째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를 을사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 摘發 事件)이라고 하는데, 국가 기관이 천주교 신자를 공식적으로 색출하고 처벌한 최초의 박해 사건입니다. 이때 첫 순교자 김범우 선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부님 한 분 없던 시절의 일입니다.
이후 박해는 전국 단위로 네 차례 이어집니다. 1801년, 1839년, 1846년, 그리고 1866년 대원군의 박해까지. 그 사이사이에도 경상도, 전라도 등 지역 박해가 열두 차례나 있었습니다. 관청 기록에만 이름이 남은 순교자가 약 2만 명,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 공식적으로 성인품(聖人品)에 오른 순교자는 103위인데, 성인품이란 교황청이 공식 절차를 거쳐 신앙의 모범으로 공인한 가장 높은 단계의 지위를 말합니다. 나머지 수만 명은 아직 그 목록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린 부분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밀고자(密告者)의 존재입니다. 밀고자란 내부 정보를 당국에 넘겨 동료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1815년 부활절 사건을 예로 들면, 전치수라는 인물이 흉년에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살다가, 겨울이 되어 더 얻어먹을 것이 없어지자 안동 관아에 밀고했습니다. 그 결과 경상도 북부 태백산 자락 교우촌 다섯 곳에서 75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역시 사위의 밀고로 순교했다는 점입니다. 순교자와 밀고자가 한 가족 안에도 공존했던 것이지요.
한국 천주교 박해기의 순교자와 밀고자의 역사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사건 — 첫 순교자 김범우 선생 순교, 밀고로 촉발
  • 1801년 1차 전국 박해 — 정약종, 이승훈 등 핵심 지도자 순교, 밀고자 김순석 개입
  • 1815년 부활절 사건 — 밀고자 전치수의 고발로 교우촌 75명 일거 체포
  • 1839년 2차 전국 박해 — 순교록(殉敎錄) 기록 덕분에 70위 성인 탄생 가능
  • 1866년 4차 전국 박해 — 서울 양화진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릴 만큼 대규모 처형

순교록(殉敎錄)이란 순교자의 이름, 신앙 고백, 처형 방식 등을 기록한 문서로, 성인 시성(諡聖) 심사의 핵심 증거가 됩니다. 시성(諡聖)이란 교황청이 공식 조사를 거쳐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절차입니다. 1839년 박해 때 70위의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주교님의 명령으로 살아남아 기록을 남긴 한 인물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 "지혜 일기"는 훗날 최양업 신부님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시성 심사에 제출했습니다. 기록 하나가 70명의 명예를 지킨 셈입니다. 

내 안의 순교자와 밀고자, 어느 쪽에 가까운가

오늘의 순교 정신(殉敎精神)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순교 정신이란 신앙과 진리를 위해 자신의 이익이나 안위를 기꺼이 포기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집니다.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과연 일상에서 밀고자 쪽으로 기울지 않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우촌(敎友村)이란 박해를 피해 산속 오지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마을을 말합니다. 베티, 한티, 찰티, 미리내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라는 연대 처벌 제도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가작통법이란 다섯 집을 한 묶음으로 삼아, 그 안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다섯 집 모두를 처벌하는 제도입니다. 농토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앙을 택했습니다.
제가 이 역사를 다시 읽으면서 계속 마음이 걸렸던 것은, 밀고자를 순교자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처리하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밀고자와 순교자는 분리된 두 집단이 아닙니다. 전치수도 어쩌면 교우촌을 찾아올 만큼 신앙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두 가지 가능성이 함께 있었고, 배고픔과 추위가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밀고자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당 신부님 뒤에서 말을 얹고, 공동체 안에서 출석도 안 하면서 분란만 키우는 행동, 그것이 오늘 시대의 밀고자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성경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밀고자도 아니다'라는 중간 지점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졌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형제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순교 정신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천주교 신자는 추석에 제사 대신 꼭 미사를 드려야 하나요?
A. 반드시 '미사로만'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분향과 절 등 조상 공경의 행위를 전례 안에서 표현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저처럼 미사 예물을 봉헌하고 분향으로 조상을 기리는 방식이 많은 신자들에게 의미 있는 선택이 되고 있습니다. 궁금하다면 본당 신부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Q.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외에도 성인품에 오를 순교자가 더 있나요?
A. 있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 각 교구에서는 1801년 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 이승훈 등 수많은 순교자를 새로 시성하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입니다. 시성 절차에는 기적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의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이 매우 중요합니다.

Q. 교우촌이란 무엇이고, 지금도 순교 성지로 방문할 수 있나요?
A. 교우촌은 박해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산속 오지에 숨어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마을입니다. 베티, 한티, 찰티, 미리내 등이 대표적이며, 현재 대부분 순교 성지로 지정되어 누구나 방문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티 성지(경북 칠곡)나 미리내 성지(경기 안성) 등은 피정의 집과 묘역이 잘 정비되어 있어 신자들이 많이 찾습니다.
Q. 오가작통법은 어떤 법이었고,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나요?
A. 오가작통법은 1801년 1차 전국 박해 당시 강화된 제도로, 다섯 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연대 책임을 지게 한 신고 강제 법령입니다. 이 법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도시와 농토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박해 속에서도 신앙 공동체가 산 속 깊은 곳에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Q. 1815년 부활절 사건은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나요?
A. 아무도 존재조차 몰랐던 교우촌이 역사 기록 속에 처음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밀고자 전치수의 고발로 태백산 일대 다섯 교우촌 신자 75명이 일거에 체포되었고, 이 사건을 통해 그 이전까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교우촌의 실체와 신자들의 삶이 공식 문서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해가 기록을 낳은 셈입니다.

올해 추석은 제게 생각보다 훨씬 풍성한 날이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의 밤나무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태풍을 맞고 천둥을 견뎌야 밤 한 톨이 영근다는 말, 순교자들의 역사가 그 비유와 정확히 겹쳐 보였습니다. 순교성월이 끝나도 이 질문은 계속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저는 지금 순교자 쪽에 가까운가, 아니면 밀고자 쪽에 가까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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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tundra7.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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