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주교 전파 (서세동점, 자생신앙, 토착화)
40대가 되어 서야 천주교에 입교
댓글 부탁,감사합니다.
저는 40대가 되어서야 천주교에 입교 한 사람입니다. 입교 하게된 동기는 2013년 불행하게도 큰 교통사고가 저에게 닥쳐왔습니다. 그 충격으로 내가 내 정신이 아닌 상태 일 정도로 극심한 멘탈 붕괴에 빠졌습니다. 막 정신이 나간 상태로 거리로,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헤메고 있었습니다. 이후 절에도 가서 며칠씩 있기도 하고 해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당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오가다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찌그리 고맙던지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앙이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느님을 신앙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감사 합니다. 지금에 와서 김 교수님의 조선의 신자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웠던 박해의 시기를 지나며 지켜온 신앙 선조님들이 너무나도 존경스럽고 크나큰 감동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 선조들의 대 서사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늦게 들어 왔습니다. 그것도 선교사 한 명 없이 스스로 신앙을 들여온 조선 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 꽤 달랐습니다.
서세동점의 파도가 아시아를 바꾸다
종교 역사에서 16세기는 두 가지 큰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입니다. 하나는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메리카와 아시아 항로를 열면서 문화와 종교가 전 지구로 퍼지기 시작한 것, 다른 하나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같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여기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보편 교회인 가톨릭(Catholic)에 '저항(protest)'한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개신교'라는 표현은 사실 세계 어디서도 통용되지 않는 한국식 용어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분열이 오히려 가톨릭 내부의 개혁에 불을 당겼다는 점입니다. 이냐시오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Jesuits), 도미니칸회, 프란치스칸회 같은 수도회들이 교황의 인가를 받아 전교 수도회로 거듭났습니다. 전교 수도회란 수도원 안에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수도 단체를 뜻합니다. 이 흐름이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서구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오는 역사적 물결과 맞물리면서 아시아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1541년, 예수회의 핵심 창설자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리스본 항구를 떠나 인도 고아에 상륙했습니다. 8년간 아시아 전역을 선교하던 그는 한지로라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해 나가사키 일대에서 포교를 시작합니다. 일본 천주교 역사는 이 해를 기점으로 공식 출발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 선교는 선교사가 왔기 때문에 시작됐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저는 이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이면에 유럽 내부의 분열과 개혁이라는 복잡한 동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1541년: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인도 고아 상륙 — 아시아 선교 본격 시작
1549년: 일본 가고시마 상륙 — 일본 천주교 전파 원년
635년: 네스토리아니즘(경교)이 중국 당나라에 전파 — 중국 기독교 첫 기록
예수회·도미니칸회·프란치스칸회 — 교황 인가를 받은 주요 전교 수도회
요약: 16세기 서세동점과 가톨릭 내부 개혁이 맞물리며 아시아 선교가 시작됐고, 일본은 1549년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선교사 없이 스스로 꽃핀 조선의 자생신앙
중국의 천주교 전파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635년 당나라 때 들어온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입니다. 네스토리아니즘이란 5세기 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종파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성모)'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경교(景敎)라 불렀고, 약 200년간 당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훗날 섬서성(陝西省)에서 발견된 비석, 이른바 '경교비'를 통해 확인됩니다. (출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장보고의 청해진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였습니다. 경교가 그 시대 중국에 크게 퍼져 있었다면 신라가 전혀 몰랐을 리 없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그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가 외래 사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슬쩍 들어와서 토속 신앙과 어울려 노는' 방식이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 오히려 납득이 됐습니다.
불교가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불교는 고구려와 신라에 들어와 토착 샤머니즘과 혼합되면서 산신각, 천도재, 49재 같은 형태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습합(習合)이라고 합니다. 습합이란 서로 다른 두 종교나 사상이 구분 없이 뒤섞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신자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선교사가 먼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국에 건너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조선 땅에 들여왔습니다. 세계 교회사에서도 드문 자생적(自生的) 신앙 공동체의 탄생이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6·25 발발 직전인 5월, 개신교 목사 김양선이 경주에서 통일신라 시대 양식의 전(塼, 바닥에 까는 벽돌)을 하나 발견합니다. 전이란 지금으로 치면 바닥 타일과 비슷한 건축 자재인데, 그 문양 양식이 통일신라의 것이면서도 경교와 연관될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 발견은 당나라 경교와 신라의 연결 고리를 탐색하는 연구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아직 결론은 없지만, 저는 이 미완의 이야기가 오히려 조선 자생 신앙의 독특함을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조선 천주교는 선교사 파견 없이 선각자들이 스스로 배워 들여온 세계 교회사에서도 희귀한 자생 신앙 공동체로 출발했다.
박해를 버텨낸 신앙이 만든 토착화의 길
천주교가 낯선 나라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존 종교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가 맞습니다. 불교가 토착 샤머니즘과 습합돼 '산신각을 모시는 절'이 된 것처럼 섞이면 결국 두 신앙 모두 약해집니다. 진정한 토착화(土着化)란 외래 신앙이 그 땅의 문화와 야합하는 게 아니라, 그 땅의 전통 신앙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토착화란 한 종교가 특정 문화권 안에서 그 문화의 언어와 감수성으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뜻합니다.
제가 2013년 사고 이후 멘붕에 빠져 있었을 때 절에도 가보고 여러 곳을 헤메고 있을 때입니다. 절에서 위로를 전혀 못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형식은 거기 있었는데 제 마음 안쪽까지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성당에서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저에게 전해주시는 걸 들으며 석 달을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기적 처럼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저에게는 그때가 가장 어려웠으며 신앙이 깊어 지는 시기 였습니다. 하느님 감사 합니다. 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는 조선 순교자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선조들을 기리며 오늘도 성당에서 기도합니다. 하느님 그들의 영혼을 생각 하시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주세요. 그들에게 평화를 주세요.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우리 인간에게는 보이지도, 만져 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십니다. 이 신앙을 믿는데 40년 넘게 걸렸습니다.
조선 신자들은 불교 국가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 천주교 신자 수는 약 500만 명에 이릅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한 명 한 명이 누군가의 순교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순교자들은 기존 민간 신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 신앙으로 자신의 영혼을 상승시켰고, 그 힘으로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당만 열심히 다닌 신자였는데, 이 역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조선 선각자들이 열린 눈으로 신앙을 들여왔다면, 지금 저는 그 신앙을 열린 손으로 나눠야 할 차례라는 생각입니다.
나도 이제 신앙 생활을 한지가 20 여 년 되었습니다. 신앙을 갖기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천양지차 입니다. 우선 나의 정신이 늘 맑습니다.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생활하는 면도 전과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살아 오면서 나의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남들 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 했습니다. 내가 우선 이었고 나 밖에 몰랐습니다. 지금은 타인들을 먼저 생각 하고 행동 합니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고 그럽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이 확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마음은 온유해 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사랑 입니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신비,기적 입니다. 성당에 봉사 하며 살고 싶습니다. 먹고 사느라 쪼들리지만 그래도 봉사는 해 보겠습니다. 늘 미사 참석은 잘 합니다. 그 것 많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요약: 진정한 토착화는 기존 신앙과의 습합이 아니라 상승이며, 조선 순교자들은 그 길을 목숨으로 증명해 오늘날 500만 신자 공동체의 뿌리가 됐다.
자주 묻는 질문
Q. 조선에 천주교를 처음 전한 선교사가 따로 있나요?
A. 이 점이 조선 천주교의 가장 독특한 특징입니다. 일본과 중국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같은 선교사가 먼저 들어온 반면, 조선은 선교사가 아닌 조선인 선각자들이 스스로 중국에서 교리를 배워 들여왔습니다. 세계 교회사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신앙 공동체는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Q. 경교(景敎)가 천주교와 다른 건 뭔가요?
A. 경교는 5세기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네스토리아니즘 종파입니다. 성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한 것은 천주교와 같지만,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 핵심적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교를 천주교의 전파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엄밀히는 별개의 종파입니다.
Q. 습합과 토착화는 어떻게 다른가요?
A. 습합은 두 신앙이 경계 없이 섞여 각자의 본질이 흐려지는 현상이고, 토착화는 외래 신앙이 그 땅의 문화적 언어로 뿌리를 내리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과정입니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이 습합의 예라면, 조선 순교자들이 유교 문화권에서 신앙을 지킨 것이 토착화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Q.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A. 16세기 마르틴 루터 등이 가톨릭 교회를 떠나 저항(protest)한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개신교'라는 표현은 한국 고유의 용어이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입니다. 반면 가톨릭(Catholic)은 '보편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됩니다.
결론
중국과 일본은 선교사가 먼저 왔습니다. 조선은 달랐습니다. 불교 국가라는 불모지에서, 선교사 한 명 없이, 스스로 신앙을 찾아 들여온 선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목숨으로 지켜낸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신앙이란 누가 가져다 줄 때보다 스스로 찾아갔을 때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2013년 제가 돌고 돌아 성당 문을 두드린 것처럼, 조선의 선각자들도 돌고 돌아 결국 같은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물결 속에서 아시아에 전파된 천주교가 조선 땅에서만 유독 자생적으로 싹을 틔웠다는 사실은, 조선인의 열린 민족성과 진리를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저도 이 신앙의 흐름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성당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교에도 더 성실히 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참고: www.tundra7.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