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순교 영성, 신앙 결단, 천주교 역사)

하느님의 기적을 보여주시다. 365 일 만의, 세례 받은 베드로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창조 하고 계신다

 댓글 부탁,감사합니다.

처음에 성당에 다닐 때 교리 교육을 6 개월 동안 받았다. 

내게 세례를 주신 신부님께서 직접 강의를 해 주셨다. 

오래 전 일 이라 기억이 좀 흐리긴 하다.  열 일곱 명 쯤 되었던 것 같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 한 시간 씩 했었다, 그때 봉사자 분들도 여러분 계셨었다. 

다과에 과자 등을 간식으로 준비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다. 

그 때는 미사 때에 성체를 모시지 못하였다,  아직 세례를 받기 전이어서 그렇다.

다니면서 보니까 대부님께서 레지오를 하시고 계셨다, 나도 그 기도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졌다,그래서 대부님께 말씀드려서 정회원은 아니고 예비 회원으로 참여 하게 되었다. 

어느 덫 교리 교육이 끝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처음 성당에 간 날짜가 2013년 12월 22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세례 식이 있었던 날 인것같다, 내가 세례를 받은 날은 2014년 12월 21일 이었다.

훗날 이 날짜를 보고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섰다. 

가만히 보니 나를 하느님 앞으로 부르 실 때도 인사 사고로 엄청난 데미지를 주셔서 부르셨다. 

그런데 세례 날짜가 성당에  처음 간날로 부터 정확하게 365일 되는 날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신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인간이 이렇게 정교하게 일 년을  맞출 수가 있을까? 그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오직 하느님 창조 물 인 것이다. 

이러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잘 생각 해보시면 깜작 놀라실 것입니다.  

이래서 나는 하느님께서 저를 선택 하셔서 교회로 이끄셨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완전한 무신론 자였기에 더욱더 놀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지만 여러분들은 이글을 보시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내가 이 강의를 들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황사영 그 분은 진짜 신자 였습니다.


 

황사영!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사람입니다.

1801년 짧은 생을 순교로 지켜내신 진실한 성인 이라고 생각 합니다.아직 자료가 부족해서 성인 품에는 안 오르셨지만 나는 진정한 성인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과거 장원 급제 할 정도로 천재 였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알고 부터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 순교 하실 때 까지 포교 사업에 전념 하신 분 입니다.

 베론의 토기굴에 숨어 지내며 박해의 참상과 조선 교회의 상황을 토로하고, 북경 주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대형 비단 편지인 황사영 백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백서를 전달하려던 계획이 사전에 포착되어 체포되었고, 능지처참형을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와 귀족 신분 모두 내려놓고 조정의 천주교 금지령에 불구하고 장안을 다니며 천주교 교리를 전파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 황사영님 처럼 살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미사는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여러분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 생활로 삶을 이어갑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7살 청년이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을 받던 1801년, 
그의 품 안에는 가로 62cm 세로 38cm 비단 천 위에 1만 3천여 자를 깨알같이 눌러 쓴 편지 한 장의 운명이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황사영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가 남긴 백서(帛書)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쯤 서 있는지 되묻는 거울입니다.


순교 영성 — 버리는 것에서 시작되다


천주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많은 분들이 "나도 신앙을 더 깊이 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라는 막막함을 토로합니다. 

황사영의 삶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그러나 가장 선명한 답입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17살에 정조 14년(1790년) 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인물입니다. 

장원급제란 수천 명의 응시자 중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최고 성적을 뜻합니다. 

임금이 직접 그의 손을 잡고 스무 살이 되면 중용하겠다 약속했고, 내탕금(內帑金)에서 급양비(給養費)를 직접 하사했습니다. 

급양비란 조선 시대 임금이 사비를 털어 학자에게 지급하던 생활비로,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혜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천주교 교리를 접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만인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던 수염을 잘랐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칭찬은 기분 좋은 것이지만, 그 칭찬이 자신의 영혼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그 다음에는 11대 명문 대가의 귀족 신분, 중용 약속, 급양비를 순서대로 내려놓았습니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도 소용없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단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외면의 영광(수염, 외모적 자존심)을 먼저 내려놓았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귀족 계급을 포기했습니다.

임금이 보장한 출세 경로와 재정 지원을 거절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충청도 세천 땅 베론(Beron)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박해 현실을 직시하고 교회 연결을 위한 백서 작성을 결의했습니다.



베론(Beron) 성지는 현재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곳으로,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구우며 신앙을 지키던 토굴촌입니다. 

저도 언젠가 꼭 직접 가보고 싶은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황사영은 옹기굴의 연기 속에 앉아 조선 교회의 참상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였습니다.


신앙 결단 — 365일의 기적과 27살의 선택


저는 2013년 12월 22일 처음 성당 문을 열었습니다. 

완전한 무신론자였던 제가 그날 처음 미사 분위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14년 12월 21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두 날짜를 놓고 보니 365일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정교하게 1년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이건 내 선택이 아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카락이 바짝 섰습니다.


황사영의 신앙 결단도 그런 정밀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스승으로 모신 정약종(丁若鍾) 선생은 한국 초대교회 최고의 평신도 신학자였습니다. 

정약종이란 인물을 소개하자면, 다산 정약용의 바로 위 형으로,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밥도 잠도 거부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는 최초로 한글로 천주교 교리 전체를 저술한 인물입니다. 

호교론(護敎論)이란 신앙을 논리적으로 변호하고 설명하는 학문인데, 정약종은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지식인을 설득하면서도 글 모르는 아낙네에게는 그들의 언어로 같은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200년 전 평신도가 해낸 일입니다.


황사영은 그 정약종의 문하에서 교리를 배웠고, 정약종의 큰형 정약현(丁若鉉)의 딸 정난주(丁蘭珠)와 혼인했습니다. 신앙과 삶이 하나로 엮인 결혼이었습니다. 그

러나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11살의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했습니다. 

수렴청정이란 어린 왕 대신 왕실 어른이 발을 내리고 뒤에서 국정을 대신 처리하는 제도입니다.

 정순왕후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국적으로 내렸고, 그것이 조선 최초의 전국 규모 천주교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령 속에서 황사영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베론 토굴에 앉아 붓을 들었습니다. 

신유박해에 대한 자세한 역사 자료는  href="https://www.cha.go.kr" target="_blank",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국가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순교 역사입니다. 그의 나이 27살, 갓 결혼한 남편이자 젖먹이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선택 앞에서 저는 제 세례일 365일의 기적이 얼마나 작고 개인적인 이야기인지 다시 느낍니다. 

황사영은 민족 전체의 구원을 위한 결단을 내렸으니까요.


천주교 역사 — 백서가 남긴 질문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현재 바티칸 교황청 전용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25년 로마에서 한국 순교 79위 시복식(諡福式)이 열렸을 때,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 바친 예물이 바로 이 백서 원본이었습니다. 

시복식이란 순교자나 성덕이 뛰어난 이를 복자(福者)로 공식 선포하는 가톨릭 의식입니다.


백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 30여 명의 생생한 순교 기록, 둘째는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현황, 셋째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네 가지 방안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황사영은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유럽 여러 나라가 이 가난한 우리나라를 도와달라"고 썼습니다. 

천주교만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한 국제 협력 요청이었습니다. 200년 전의 외교 문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 정부는 이 원본 백서를 봉인하고 870자짜리 가짜 백서를 만들어 황사영을 민족 반역자로 몰았습니다. 

이것이 역사 교과서에 남은 왜곡입니다. 

실물 크기 동판 사본이 제작되어 학자들에게 배포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한 줄에 1,010자씩 122줄, 전체 1만 3,311자가 단 하나의 약자(略字) 없이 모두 정자(正字)로 쓰였습니다. 

그 손의 주인은 필체만으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정난주 여사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남편이 처형되고 본인은 제주도 관노(官奴)로 끌려갔습니다.

 관노란 관청에 소속된 노비 신분으로, 조선 시대 신분제 최하층이었습니다. 

젖먹이 아이를 제주로 가는 배 위에서 추자도 절벽 아래 바위 위에 내려놓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 아이는 오씨 성을 가진 농부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았고, 지금도 추자도에 가면 오씨와 황씨가 형제의 의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정난주 여사는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다 죽었는데, 동료 노비들이 그를 '서울 아씨마님'이라 부르며 무덤을 100년 동안 지켰습니다. 

현재 제주도에 순례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은  href="https://www.cbck.or.kr" target="_blank",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순교 자료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는데, 황사영이 버린 것들의 목록이 마음에 박혔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과연 신앙을 위해 무언가를 내려놓은 적이 있었는지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그분이 세상의 부귀 전부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저는 아직 작은 습관 하나도 제대로 버리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러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황사영 백서는 현재 어디에 있나요?

A. 원본은 바티칸 교황청 전용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25년 한국 순교 79위 시복식 때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 예물로 헌정했습니다. 실물 크기 동판 사본이 별도로 제작되어 국내 학자들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된 바 있습니다.


Q. 황사영이 민족 반역자라는 평가는 사실인가요?

A. 조선 정부가 원본 백서를 봉인하고 870자짜리 안작 백서(가짜 백서)를 별도로 만들어 황사영을 반역자로 몰았다는 것이 역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백서 원문에는 "우리나라를 도와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는 특정 종파의 이익이 아닌 조선 전체를 위한 국제 협력 요청으로 해석됩니다. 

역사 교과서의 기술이 완전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Q. 베론 성지는 어떻게 가나요? 지금도 순례가 가능한가요?

A. 베론 성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순례지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했던 토굴 터와 성 요셉 신학교 터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개인 차량이나 대중교통으로 방문 가능하며, 사전에 천주교 청주교구 홈페이지를 통해 일정을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Q. 황사영은 왜 아직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지 않은 건가요?

A. 시성(諡聖)이란 복자를 성인으로 공식 선포하는 가톨릭 절차로, 시복 이후 추가적인 기적 심사와 광범위한 자료 검증이 필요합니다. 

황사영의 경우 역사 기록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 이력이 남아 있어 자료 정리와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를 진정한 순교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시성 청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 정난주 여사 순례지는 어디에 있나요?

A. 정난주 여사의 묘소는 제주도에 있으며 현재 천주교 순례지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동료 노비들이 100년 가까이 지켜온 무덤이 전해 내려와 발굴·정비된 곳입니다. 

제주도 방문 시 순례 코스에 포함시켜 방문하실 수 있으며, 제주교구 홈페이지에서 위치와 순례 안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를 처음 접하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의 목록을 한번 직접 써보십시오. 급양비, 중용 약속, 귀족 신분, 아름다운 외모, 출세 경로. 그리고 내가 신앙을 위해 지금껏 내려놓은 것의 목록도 써보십시오. 

두 목록을 비교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저절로 보입니다. 

황사영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 하나를 올해 안에 버려보는 것에서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순교자를 기억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주요 대표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 (1846년 병오박해 순교)   


성 정하상 바오로: 《상재상서》를 작성하여 교리를 옹호한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 (1839년 기해박해 순교)   


성 앵베르 주교 / 성 모방 신부 / 성 샤스탕 신부: 조선에 들어와 활동한 파리 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


성 남종삼 요한: 조선의 고위 관직(승지)을 지낸 인물 (1866년 병인박해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1791년 신해박해 순교)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중국인 사제 (1801년 신유박해 순교)   


복자 강완숙 골롬바: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한 평신도 학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


2.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명단 구성 (1984년 시성)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오른 103위 성인 명단 일부입니다.


한국인 성직자 (1명): 김대건 안드레아   


외국인 선교사 (10명): 앵베르 범세형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 베르뇌 장 주교, 브르트니에르 백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도리 김 신부, 푸르티에 신부, 쁘띠니콜라 신부, 다블뤼 안 주교 등   


한국인 평신도 (92명): 정하상 바오로, 남종삼 요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유대철 베드로(최연소, 13세), 유소사 체칠리아, 김효임 골룸바, 김성우 안토니오, 이윤일 요한 등   


(전체 103위 명단은 가톨릭 굿뉴스 103위 성인 명단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124위 순교 복자 명단 구성 (2014년 시복)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로 시복된 명단입니다.


주요 인물: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주문모 야고보(신부), 강완숙 골롬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이승훈 페드로, 최창현 요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   


(전체 124위 명단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124위 복자 명단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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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www.tundra7.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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