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기원 (부연사행, 서학, 선교)
선교사가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땅에서 어떻게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처음 공부했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서 한참을 멈췄습니다. 책 한 권이 씨앗이 되어 신앙 공동체가 자라났고, 그 공동체가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부연사행, 조선과 세계를 연결한 통로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외교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사대교린이란 중국 같은 강대국에는 예를 다해 섬기고, 여진·왜 같은 주변 소국에는 힘으로 대응한다는 이중 외교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따라 조선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사신 행렬을 통틀어 부연사행(赴燕使行)이라고 부릅니다. 부연사행이란 연경, 즉 오늘날의 베이징으로 향하는 공식 사절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팀의 규모가 350명 안팎이었습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세 명이 핵심이고, 수행 선비 10여 명, 조공품을 운반하는 마부와 짐꾼 200여 명, 여기에 인삼·비단 장수 같은 상인들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서울을 출발해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까지 걸어서 한 달 반, 현지 체류 한 달, 귀환 한 달 반. 왕복에 최소 석 달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외국을 직접 볼 수 있는 방법은 이 부연사행에 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짐꾼으로라도 따라가 중국 한 번 다녀오면 고향에서 대단한 인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가장 신기하게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베이징의 성당이었습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세운 남당(南堂)을 비롯해 동당·북당까지 네 곳의 성당이 연경 입성 19경(景), 즉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의 19개 명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들보도 없는데 100명이 들어간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됩니다.
부연사행이 가져온 것은 구경담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는 책들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한역서학서란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과 천주교 교리를 한문으로 번역해 소개한 책들을 묶어 부르는 말입니다. 천문, 지리, 화포 제조법, 자명종 원리 같은 과학 내용과 천주교 교리가 한 권에 섞여 있었습니다. 실록에는 1632년 정두원이라는 진주사가 귀국하면서 한역서학서와 자명종, 세계지도를 함께 가져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조선에 유입된 한역서학서는 110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선 선비들은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별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학(西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공부했습니다. 서학이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한역서학서를 통해 접한 서양 학문 전반, 특히 천주교 신앙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서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근대 문명 전체를 수용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신앙으로, 조선 선비들의 선택
한역서학서를 가장 먼저 신앙으로 실천한 인물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꼽힙니다. 역사 기록에는 "허균이 부연사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가 계12장을 얻어와 아침저녁으로 읽었다"고 나옵니다. 계12장이란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을 가리킵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문을 바쳤다는 것, 저는 이것이 신앙 실천의 명백한 증거라고 봅니다. 영세도 강론도 없었지만, 기도를 생활화한 사람을 신자가 아니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할 인물은 홍유한입니다. 경상도 출신의 이 양반 선비는 성호 이익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천주교 교리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울 생활을 접고 경상도 영주로, 다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실천한 방식입니다. 주일(主日)이 7일마다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요일 개념이 없었던 그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스스로 주일로 정해 단식과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달력에 주일이 표시되어 있어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사를 빠지는 저 자신과 너무 대조가 됐기 때문입니다. 홍유한은 비 오는 날 말을 타고 가다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을 보자 말에서 내려 노인을 태우고 짐은 자신이 졌습니다. 말에 짐을 얹지 않은 것은 짐승을 혹사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고 합니다. 200년 전에 이미 교환 정의(交換正義)가 아닌 분배 정의(分配正義)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교환 정의란 주고받은 것이 대등해야 공정하다는 원칙이고, 분배 정의란 필요와 형편에 따라 나누는 더 넓은 정의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천진암·주어사 강학회(講學會)입니다. 강학회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뜻합니다. 1777년 혹은 1779년(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광암 이벽 선생이 중심이 된 이 모임에서 조선 선비들은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벽 선생이 겨울 눈 덮인 산에서 횃불을 들고 찾아갔다는 일화는 단순한 미담이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783년,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사절단을 따라 베이징에 갑니다. 동지사란 동짓날 무렵 중국에 파견되는 정기 사신으로, 부연사행의 한 종류입니다.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를 만나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고, 우여곡절 끝에 영세를 받아 돌아옵니다. 그가 받은 세례명이 베드로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라는 사실보다 저는 그가 조선 양반으로서 천주교 교리에 따라 첩을 두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영세를 받았다는 점이 더 와 닿습니다. 당시 법적으로 허용된 관습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 형제, 이존창, 유한금, 홍교만 등 10여 명이 정기 집회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의 공식 출발점입니다. 그 자리가 훗날 명동성당(明洞聖堂)이 들어선 터입니다. 100년의 박해가 끝나고 1900년대에 접어들어 교회가 그 땅을 사들여 기념 성당을 세운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사이트에서는 초기 교회사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는 한국에 온 적 없는 서양인이 파리 외방전교회 도서실에서 선교사들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로 쓴 기록으로, 한국 순교사의 1차 사료로 꼽힙니다. (국립국어원 한국어 자료 참조).
초기 한국 천주교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선교사 없이 평신도 스스로 교리를 연구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세계 유일의 사례
- 서양 과학기술 문명과 천주교 교리를 분리하지 않고 '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수용
- 영세 성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기도·단식·애덕 실천 등 신앙생활을 자발적으로 시작
- 신앙 수용 이후 짧은 시간 안에 순교자가 나올 만큼 강한 신앙 정체성을 형성
- 명례방 집회에서 시작해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 보유
지금 이 시대의 선교,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던 6월의 어느 날, 저는 공원을 여러 바퀴 돌았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신부님 강론 중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당에 가기 싫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의지로라도 가십시오." 망설이면서도 발걸음을 성당으로 돌렸습니다.
성당 한켠에 돌로 조각된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성호경을 그으며 인사를 드리는데, 찰나의 순간 성모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환한 미소를 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왔구나" 하고 반겨주시는 느낌이었습니다. 돌 조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았습니다. 이런 체험을 해본 분이라면 이해하실 텐데, 이런 이야기를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분들께 드리면 대부분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게 솔직히 가장 안타깝습니다.
광암 이벽이 대토론회에서 유학 대표를 논리로 이겼지만 그 상대방이 신앙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고 "신앙은 토론에 이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깨달았다는 대목이 저는 참 마음에 남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알리고 싶어서 열심히 설명하다가 오히려 상대방이 더 멀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선교(宣敎)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은 합니다. 선교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신앙으로 나아오도록 이끄는 행위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마음이 어느새 평화로워져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아까는 제가 미안했어요"라고 말했고, 아내도 자기가 심했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렇게 화해했고, 맛있는 저녁도 먹었습니다. 그 평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저는 압니다.
그러면서 홍유한이 밭값을 물어주며 한 말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이 사람아, 이런 경우도 있다네." 분배 정의를 교리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았던 그 선비처럼, 저도 하느님 안에서 경험한 것을 말보다 먼저 삶으로 보여야겠다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극적인 회심(回心)을 경험한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은 때와 방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회심이란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켜 하느님께 나아가는 내적 변화를 뜻합니다. 제가 할 일은 그 부르심이 올 때 상대방이 기꺼이 응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한국 천주교가 선교사 없이 시작됐다는 게 사실인가요?
A. 맞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어느 나라든 종교가 정착하려면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국은 조선 선비들이 부연사행을 통해 들여온 한역서학서를 스스로 읽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 교회 역사에서 한국 천주교를 평신도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Q. 부연사행과 동지사는 어떻게 다른가요?
A. 부연사행은 조선이 중국에 보낸 모든 종류의 사신 행렬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그 안에 임무에 따라 주청사, 경하사, 성절사 등이 있는데, 동지사는 그중 동짓날 무렵 출발하는 성절사의 한 종류입니다. 이벽의 부탁으로 이승훈이 베이징에 가서 영세를 받은 것도 바로 이 동지사 행렬을 따라간 것입니다.
Q. 서학(西學)이 천주교와 같은 말인가요?
A.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서학은 원래 서양에서 온 학문 전반, 즉 과학·지리·천문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습니다. 다만 조선 선비들이 서학을 공부하면서 천주교 교리와 서양 과학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수용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서학이 천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좁혀져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Q. 성당에 가기 싫을 때 억지로 가도 의미가 있을까요?
A. 이것은 신앙을 감정의 문제로 볼 것이냐, 의지의 문제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감정이 따르지 않더라도 의지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신앙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내와 다툰 날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성당에 갔다가 성모님의 미소를 체험한 것처럼, 의지로 문을 열었을 때 은총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Q. 명동성당이 한국 천주교 첫 집회 장소라는 게 맞나요?
A. 정확히는 명동성당이 들어선 자리가 첫 집회 장소입니다. 1784년 이벽, 이승훈 등이 명례방의 역관 김범우 집에서 정기 집회를 시작한 것이 한국 천주교 공동체의 출발점인데, 그 이후 100년에 걸친 박해가 끝나고 1900년대에 교회가 그 부지를 매입해 명동성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은 단순한 성당이 아니라 한국 교회 탄생의 자리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어쩌다 이렇게 됐다"는 우연의 역사가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 땅에서 순교한 조선인들의 기도, 소현세자의 편지가 파리 외방전교회 설립으로 이어진 흐름, 부연사행을 타고 들어온 책 한 권이 공동체로 자라난 과정.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 역사를 더 많은 분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명동성당에 가게 된다면, 그 입구에 서서 잠깐이라도 이 이야기를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www.tundra7.com
